케네디 대통령: 왜 암살 당했나?
관리자  |  05/01/22  |  조회: 16  

2022년5월 1일

종교와 사회: 미국의 두 얼구 (시리즈)

제목: 케네디 대통령: 왜 암살 당했나?

저자:  박창형 목사

 

Intro

케네디 대통령(5/29/1917-11/22/1963)은  전쟁과 무기가 없는 진정한 세계 평화를 추구하다가 암살 당했다. 1961년 1월 20일, 제 35대 대통령(민주당)으로 취임했으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63년 11월 22일, 달라스 (텍사스)에서 암살 당했다. 그의 암살과 관련해서 많은 이론이 제기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1963년 6월 10일, 워싱턴 D.C.에 위치한 아메리칸 대학 (American University)의 졸업식에서 전한 “평화 연설 (Peace Speech)”연설이 그의 암살을 불러온 결정적 계기였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1] 오늘은 “20세기 미 대통령이 전한 가장 중요한 연설”로 평가 받고 있는 그 연설 내용(27분 길이)을 요약해 보고, 그를 암살한 집단의 동기를  추측해 보려고 한다.

 

A. 핵무기 시험 금지 조약과 완전한 무기 폐지 (complete disarmament) 추구

“평화 연설”을 통해서 케네디는 그가 구상해 낸 세계 평화를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국민과 세계에 전했다. 그의 연설은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단계와 계획을 내포하고 있는데, 몇 가지 요점을 먼저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그는 그가 추구하는 평화는 “미국의 전쟁 무기로 다스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평화)가가 아니라는 파격적인 선언을 하며 본론에 들어갔는데, 이는 무기와 전쟁의 위협으로 세계 질서를 추진하던 미국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대목이다. (이는 로마가 잔인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며 부르짖던 팍스 로마나를 본 딴 구절이다. 반대로, 마가복음 첫 구절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칼과 무기로 억압된 ‘평화’를 유지하던 로마 황제가 전하는 ‘복음’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적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케네디는 팍스 로마나팍스 아메리카나와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그는 세계 평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의 일환으로 미국은 스스로 먼저 핵무기 실험을 금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소련의 후르시초프 (Khrushchev) 서기장과 영국의 맥밀란 (Macmillan) 총리와 함께 이미 핵무기 실험 금지 조약을 위해서 대화를 시작 했다고 밝혔는데, 그 후 1963년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세 정상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부분적 시험 금지 조약 (the Limited Test Ban Treaty)”에 서명했다. 핵 전쟁 공포에 떨고 있던 세상에게 대안책이 있음을 보여주었던 첫 긍정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는 조약이었다.
  3. 케네디는 “문맹과 가난과 병을 퇴치하는데 사용” 해야 할 돈을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완전한 무기 폐지 (complete disarmament)가 그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선언했다! 지구상에 무기를 모두 없애겠다고 선언 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단계를 거치면서 추진하겠지만, 평화를 추구하는 기관들 “(institutions of peace)”을 설립하여 무기와 관련된 집단을 대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군수 산업 체제를 말한 것이 아닌가?)
  4. 그는 “평화는 인간의 기본 권리 (a matter of human rights)”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안하면서, 사람은 “파멸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한 삶”을 누릴 권한이 있다고 역설했다. (당시 미국민들은 소련의 공격과 핵전쟁과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앉고 살고 있었다. 언론은 공산주의와 핵 전쟁 가능성을 거의 매일 보도 하였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주기적으로 반공 연습을 시행하고 있었다. 정말 모두가 전쟁의 공포에 떨며 살고 있던 시절이다!)
  5. 그는 “미국은 절대로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이 세대의 미국민은 벌써 필요 이상의 전쟁과 미움과 압박을 체험했다.”고 욻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끝 맺었다.

“우리는 약자가 안전을 느끼고 강자가 정의로운 세계 평화를 추진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맡은바 책임을 이행할 것이다. 우리는 이 도전 앞에 무력(helpless)하지 않고, 성공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는다(hopeless). 두려움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는 전멸 (annihilation)을 위한 전략이 아닌 세계의 평화를 위한 전략을 가지고 전진해 나아갈 것이다.” 이 연설은 감명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B. 케네디의 운명을 결정지은 10월의 결정: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 명령

케네디가 만약에 핵무기 실험 금지 조약에 서명을 하고, 전쟁과 무기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고 선언하고 끝냈더라면 암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63년 10월 11일, 암살 당하기 약 6주 전, 군수산업체제 집단이 받아 들일 수 없는 결정을 집행했다. 그날 그는 비밀리에 행정명령을 내렸다. (재임 선거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케네디는 소련에 너무 약하다는 언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일을 추진했다.) 국가안보행정메모 263 (National Security Action Memorandum 263)으로 명명된 이 명령을 통해서 케네디는 장교급에 속하는 천명의  미군을 1963년 12월 말까지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고, 1965년 말까지 전 미군을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을 국방부와 국무부에 지시했다.[2]

케네디 대통령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데는 크게 두 가지 동기가 있었다. 첫째로, 1961년 5월 케네디가  인도차이나 전쟁을 직접 체험했던 프랑스의 드골 (de Gaulle)과 만났을 때 드골은 인도차이나 전쟁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고  충고 했다.[3]  또 케네디는 1951년, 그의 국회의원 시절 때 베트남을 방문하여 한 국무부 외교관 (Edmund Gullion)을 만났었는데, 그도 베트남에 집결해 있던 2십 5만명의 프랑스 군인들을 지목하면서 아무도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다며, 미국은 절대로 이 지역 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를 해 주었다. 케네디는 그의 경고를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4] 두 번째로, 케네디는 대통령이 된 즉시 펜타곤 주역들과 무기 산업 대표자들의 자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늘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음으로), 독립적인 판단과 결정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되돌아 보면, 케네디의 결정은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었던 역사적 결정이었다. 그 후, 그는 소련의 후르시초프 (Khrushchev) 서기장과 비밀리에 소통하며 인도차이나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5] 다시 말해서 케네디는 전쟁과 무기 경쟁을 정당화 시켜 온 냉전 논리와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 엎는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케네디 암살로 인해서 “국가안보행정메모 263” 지령은 이행되지 않았다.

 

C. 쿠바 미사일 사태와 눈 앞으로 다가온 핵 전쟁

1962년 10월 15일, 미국은 소련이 미국 영토에서 90마일 떨어진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립중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이 때 케네디를 둘러 싼 펜타곤 어드바이저들과 보좌관들은 소련과의 핵 전쟁을 감수하면서라도 쿠바를 군사적으로 공격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했다. 케네디는 외교적 협상을 진행하는 동시에, 소련이 쿠바에 보내는 장비들을 해상 봉쇄(blockade)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군사적 행동을 요구하는 군부 세력과 심하게 대립했다.

당시 공군 총장이었던 커디스 리메이(Curtis LeMay)는 핵 전쟁이 유발할 경우 소련은 1억 5천 5백만명이 사망할 것이나 미국은 천 5백만명 만이 사망할 것이라는 숫자를 제기하면서 핵 전쟁에서 소련을 이길 수 있다며 소련과의 핵전쟁을 고수하고라도 쿠바를 선제 공격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6] (이 때 미 군부는 인토차이나 지역에서 핵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 내기 위해서 케네디에게 극심한 압력을 가했으나 케네디는 강력하게 저들을 거부했다고 케네디 어드바이저 였던 슐레진저(Schlesinger)는 그의 저서에서 밝혔다.[7])

그러던 어느 한 날 펜타곤 어드바이저들과 장시간을 다투고 난 후, 케네디는 거의 혼을 잃은 상태에서 “아무 죄도 없는 이 나라와 세상의 어린이들이 연기와 같이 사라지는 무시한 상황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동생이자 법무부 장관이던 로버트 케네디에게 그의 심정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케네디는 합동참모의장들을 “전쟁에 미친 사람들”로 여겼고, 참모의장들은 쿠바와 소련에게 약함을 보여 주는 케네디를 카리키며, “패기 없는 젊은 놈 때문에 미치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1962년 10월 27일, 궁지에 몰린 케네디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로버트 케네디를  비밀리에 주 소련 영사관에 파견하였다. 로버트 케네디는 “케네디 대통령은 지금 무척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소련 대사에게 전한 후에 후르시초프 서기장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케이블로 전했다. “(케네디)대통령은 쿠바와의 전쟁을 피하려 하고 있으나 우리는 지금 군부로부터 쿠바를 선제 공격하자는 극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시간이 더 지체되면 대통령이 뜻하지 않은 사건들이 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전쟁이 유발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케네디)대통령은 후르시초프 서기장님의 도움을 직접 요청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좀 더 지연되면 군부가 (케네디) 대통령을 타도하고 권력을 쥘 것으로 보입니다.”[8] 절급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글이다. 미국에서 구테타라니!

미 공군은 10월 26일, 캘리포니아의 밴든버그(Vandengerg) 기지에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실험” 목적으로 소련 쪽을 향해 발사했다. 소련은 이 “실험” 발사를 소련을 공격하는 핵미사일로 판단하고 군사적 대응을 할 수 있었다며 역사 학자들은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에 돌입 할 수 있었던 긴급한 상황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미 공군은 소련을 공격할 핵 무기가 탑제된 대륙간 탄도 미사일 여러 대를 준비 해 놓은 상태였다. 다음 날인 1962년 10월 27일, 쿠바를 정찰하던 미국의 U-2 스파이 비행기가 쿠바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하면서, 미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황은 전쟁을 향해 숨막히게 진전되어갔다.

로버트 케네디의 케이블을 받은 후르시초프 서기장은 다음 날인 1962년 10월 28일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쿠바에서 철수한다고 밝혔다. 세계를 핵 전쟁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쿠바 미사일 사건은 케네디 대통령과 흐르시초프 서기장 간의 비밀 외교를 통해서 13일 만에 막을 내렸다.

 

D. “평화 연설 (1963년 6월 10일)

끝으로, 케네디가 전한 연설문의 정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앞 부분의 일부를 참고로 살펴 보려고 한다.[9] (번역문 앞에 기재된 숫자는 비데오의 시간대를 의미합니다.)

(2:25) “’세계 평화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평화를 말하는가요?  미국의 전쟁 무기로 다스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미국의 평화)가 아닙니다. 무덤에서나 (느끼는) 평화가 아니며, 노예가 느끼는 안전도 아닙니다. 나는 진정한 평화 (genuine peace)를 말하는 것입니다.—지구에서 사는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평화; 인류와 국가들의 성장을 도모하는 평화를 말하며, 소망을 부여하는 평화를 말합니다. 또 후세들에게 더 좋은 삶을 물려주는 평화를 말합니다. 미국인만을 위한 평화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를 말합니다. 오늘에 국한된 평화가 아니라 영구적인 평화를 말합니다.”

(3:22) “내가 평화를 말하려는 이유는 전쟁의 새로운 국면 때문입니다…단 한 기의  핵무기가 세계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이 터뜨린 전체 폭발력 보다 거의 10배가 더 강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전면전이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핵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치명적인 독이 바람과 물과 토양과 씨앗에 의해서 지구 곳곳에 퍼지고, 지금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에서 전면전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4:20)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매년 수억달러를 들여서 무기를 구축해 놓을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창조하기 보다는 파괴만 하는 무기를 쓸(데)모 없이 비축해 놓는 것은 평화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효과적인 방법도 아닙니다.”

(5:07) “어떤이들은  소련이 계몽된 태도를 갖기 전에는 세계 평화나 세계를 통치하는 법이나 세계 군비 축소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개인적 태도와 국가적 자세를 돌아 보는 것도 필수적이라고 생각 합니다… 평화에 대한 가능성, 소련에 대한 우리의 태도, 냉전과 자유와 평화에 대한  우리 내면을 관찰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6:07) “너무 많은 사람들은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위험하고 패배주의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태도는 전쟁은 불가피하고, 인류는 망할 수 뿐이 없는 운명의 힘에 붙잡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합니다.”

(6:22) “우리는 그런 견해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인간이 만든 문제이고, 때문에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원하는 만큼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초월하는 문제는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영성은  불가능해 보이는 많은 문제들을 풀어 냈습니다. 우리는 또 해 낼 수 있습니다.”

 

E. 결론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은 많은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해서 지적하고 싶은 두 가지 교훈은 미국과 세계를 지배하는 저 비밀 집단은 분명하게 존재하는 집단이며, 저들은 통령까지도 암살하는 (거대하고 철저한)조직력과 뚜렸한 목표를 가진 집단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있다. 그들의 눈에는 대통령은 대중의 주된 이목을 받으며 짧으면 4년, 길면 8년간 활동하다가 지나 갈 임시 ‘역’을 맡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저들의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일시적인 인물들이다. (간혹 오바마나 트럼프나 바이든 같이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치인이 나와서 모든 국민의 관심을 끈다면 저들은 환영한다. 매 2/4/6년 마다 시행되는 선거에 시민들이  관심을 쏟는 경우 저들은 환영한다. 낙태 등 시민들의 관심을 끄는 이슈가 대두되면 저들은 환영한다. 시민들이 저들과 저들이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갖지 않으면 된다.) 반대로, 저들은 영구적으로 미국과 세계를 지배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집단이다. 세계는 그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아무도 그들의 목적과 이해 관계를 위협하도록 놓아 두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과 이해 관계를 위협하는 자들은 모두 제거된다. 이 것이 저들에 대하여 살펴 보면 얻게 되는 결론이다.

2021년, 세계 총 국방비는 $2조를 넘었다.[10] ($2,113,000,000,000) 이 돈이 케네디 대통령이 의도한 대로 “문맹과 가난과 병을 퇴치하는데 사용” 된다면 세상은  다수가 살기 좋은 곳으로 발전 해 갈 것이다.

 

참고:

케네디는 1960년 선거에 당선 된 후 대통력직인수위원회 (Transition Team)에 가담하면서부터 그가 양심과 진리를 추구할 경우 견뎌내기 어려운 고통과 고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11] 그 후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 그가 평화 정책을 계속 지향할 경우 암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측근과 여러 번 나누었다.

케네디는 1961년 9월부터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과 비밀 서한을 주고 받았는데, 후르시초프는 그가 보낸 첫 편지에서 세상을 노아의 방주로 묘사하면서 ‘부정한 짐승’과 ‘깨끗한 짐승’이 노아의 방주에서 공존했듯이, 생각이 다른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지 못 할 경우, 이 큰 배 (즉 지구)가 침몰하게 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하면서 케네디가 1961년 6월 4일 비엔나 정상회담에서 그에게 제안 했던 세계 평화를 추진해 갈 의사가 있음을 전했다.[12] 이 편지에서 후르시초프는1961년 6월 4일 케네디가 세계 평화를 추진하자고 제안 했을 때 자기가 냉정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그도 소련 내 강경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총 21통의 편지를 나누며 둘은 라오스(Laos)가 포함된  인도차이나 등 각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던 문제를 하나씩 풀어 나가기 시작했었다.

 

 

[1] American University는 비전과 사명감을 가진 ‘공인(public servants)’을 길러 내기 위한 목적으로 1892년에 미연합감리교단에 의해서 세워진 대학교이다.

[2] James W. Douglass, JFK and Unspeakable: Why He Died and Why It Matters, p. 93: 2008. 또,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FRUS), 1961-1963, Volume 4: Vietnam: August-December1963.

[3] William Engdahl, A Century of War, p. 116. (1992)

[4] James W. Douglass, ibid, p. 93.

[5] James Douglass, ibid, p. 103.

[6] James Douglass, ibid, p. 142.

[7] Arthur Schlesinger Jr. Thousand Days: John F. Kennedy in the White House, p. 338. (1965)

[8] James Douglas, ibid, p. 27. 또 흐르시초프 자서전, Khrushchev Remembers, p. 497-98. (1970)

[9] 번역은 연설문의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함을 미리 알립니다.

[10] 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2022년 4월 22일. “World military expenditure passes $2 trillion for first time.”

[11] 참고:  1961년 1월 9일, 그의 고향인 마세추세츠 주의사당에서 전한 The City Upon a Hill Speech. 이 연설을 들으면, 그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의 심정으로 그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무척 유명한 연설이다.

[12] U.S. State Department: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1-1963, Vol 6: Kennedy-Khrushchev Exchanges. (1996)

잔 케네디 대통령
평화 연설
세상을 핵전쟁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쿠바 사태
평화 연설
핵 무기 실험
National Security Memorandum No,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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